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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제목

"한국 여성 근현대사: 정치사회사, 문화사, 인물사" 관련 신문보도 2

작성자
아시아여성연구소
작성일
2003.07.21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162
내용
<여성신문> 2003년 6월 20일 기획/특집

 - 모단걸-머리털과 함께 ‘가부장’과의 결별선언 -
 
이 글은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에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지원을 받아 연구되고 있는 〈한국 여성 근·현대사〉내용 중 일부이다. <편집자 주> 

신여성의 단발 근대화 상징이자 논란거리
전통 파괴, 여성역할 거부행위로 비난 받아

한국의 신여성은 개화기 이후 여성교육과 여성의 사회진출에 의해 생겨났다. 자의식을 가지고 사회현실에 눈뜨기 시작한 이들은 세계 여성해방의 선진적 조류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으며, 기존의 유교적 도덕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한국여성사회에 새바람을 일으킨 이들 신여성들은 모단(毛斷, modern)걸로도 불려졌다. 신여성에게서 나타났던 근대성의 지표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단발이었는데, 모던(modern)을 모단(毛斷)으로 표현할 정도로 단발은 한국 근대화의 상징적인 행위였으며, 근대적 자아 정체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1895년 말의 단발령은 남성을 대상으로 강제적으로 위로부터 짧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여성의 단발은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비교적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졌다는 점이 다르다. 여성의 단발은 1920년대에 유행하기 시작해서 1930년대 중·후반까지 오랫동안 지속됐다. 

1920년대 단발, 여성해방의 표상

어떤 여성들이 어떤 이유로 단발을 했을까? 처음 단발을 실천한 여성은 기생이었다. ‘강향란’이라고도 하고, ‘강명화’라고도 한다. 강향란은 기생 출신으로 나중에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신한 인물인데, 1922년 머리를 깎고 남장을 하고 남자들이 다니는 강습소에 나감으로써 당시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강명화 역시 기생으로 갑부의 외아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남자쪽 집안의 반대로 남자와 같이 자살한 인물이다. 

이들의 단발을 두고 당시 세간에서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그들은 나름대로 의지를 갖고 행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이월화, 김명순, 최성해 같은 여배우들도 단발을 했다. 

이들은 당시의 패션리더로서 서구의 유행을 받아들인 입장이었다. 기생이나 여배우들은 전통사회의 굴레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신분이었으므로, 신문물과 유행을 받아들이기가 비교적 용이했다. 기존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 혁명적인 사회를 건설하려고 한 허정숙, 주세죽, 심은숙, 강아그니아 등 사회주의 운동을 한 여성들은 투사적인 의지에서 단발을 감행했고, 김활란, 모윤숙 같은 지식인들은 구습의 폐단에 대한 저항으로써 단발을 했다. 

당시 진보를 자처하거나 새로운 문물에 대해 관대한 인사들은 여성의 단발을 이른바 ‘모더니즘’의 실현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단발을 편리하고 위생적이며 경제적이라는 이유와 함께 여성해방의 표상으로 내세웠다. 

투사적 의지이건, 전통에 대한 반발이건, 생활의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해서건, 단발은 당시 여성들에게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도전이요 반항이었으며,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였다. 

신여성들의 단발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남성들의 단발은 개화와 근대화의 상징이었지만 여성들의 단발은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 즉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대한 거부행위로 받아들여지면서, 단발을 하는 여성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일어났다. 최초의 단발여성이 기생이었다는 사실은 여성의 단발을 비판하는 입장에선 좋은 소재거리였다. 

기생이라는 특별한 신분에 초점을 맞추고 단발의 이유를 실연과 성(性)적 방어의 한 방편 정도로 그 의미를 폄훼했으며, 하찮은 여성의 하찮은 행위에 시선을 집중할 필요조차 없고, 다른 여성들이 별 것 아닌 것을 유행으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일까 걱정스럽다고 당시의 몇몇 글들은 얘기하고 있다. 단발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여성들이 단발을 하는 진짜 이유는 사치와 허영심, 서구문화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당시 모단(毛斷)으로도 지칭됐던 단발이 여성들에게는 단순히 머리털을 자르는 행위만이 아니라 구시대의 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문명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단발은 하나의 진보적 상징으로 인식되고 개혁적인 몸짓으로 퍼져나갔다. 단발문제는 개항이래 단순히 유행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문제였으며, 따라서 봉건적인 인습과 서구적인 인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가장 첨예한 의견의 대립으로 찬반논쟁이 빈번하였다. 

김은정/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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